Khadija Gbla: My mother’s strange definition of empowerment
카디쟈 그블라: 자율(권한)에 대한 우리 어머니의 이상한 개념
Khadija Gbla was born in Sierra Leone, spent her youth in Gambia, and as a teenager put down roots in Australia. She uses her cross-cultural heritage to promote understanding in both directions. Full b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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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personal journey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편하신대로 계셔도 되겠습니다.(웃음)
the things your body does.
뭐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태어났습니다.
영화 보셨습니까?
다이아몬드가 없습니다.(웃음)
on me, by the way.
well, that's in Sierra Leone as well.
시에라 리온에 있습니다.
여러분 안전합니다, 뛰쳐나가지 마세요.
I was checked before I got here.
오기 전에 검사받았어요.(웃음)
세 명 있었습니다.
needs more than one wife.
저에게 묻지 마세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that's what I say.
(웃음)
in Sierra Leone in 1991.
시에라 리온에 전쟁이 났습니다.
one night, everything was good.
떨어지고 있었어요.
to kill me and my family.
죽이려고 했습니다.
in Gambia, in West Africa.
피난갔습니다.
(웃음)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몰랐습니다.
was going to become of us.
정말 놀랍고 현명하신 분이에요.
호주정부가 받아들여 준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집에 오셔서,
a little holiday, a little trip."
여행가자." 라고 하셨어요.
몇 시간후에 감비아에서 멀리 떨어진
and ended up in a bush
노인이었습니다.
다시 들어갔어요.
away from us into a second hut.
두 번째 오두막으로 갔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정말 모르겠네."
I don't know what's going on."
오두막으로 데리고 가서는
바닥에 붙여 눕혀 놨습니다.
to get her off me, but I couldn't.
애를 썼지만 안됐습니다.
with a rusty-looking knife,
녹슨 칼을 가지고 왔습니다.
water or sunlight before.
물이나 햇볕에 닿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진 않고
제 음부가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to be my clitoris,
and started cutting away, inch by inch.
조금씩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so this pain will stop,
for what felt like forever,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살점을 바닥에 던졌습니다.
across the floor
she's ever touched.
만졌다는 듯이 말입니다.
and left me there bleeding,
저는 피흘리면서
as to what just happened.
정신이 없었습니다.
that we were coming to Australia,
the Sydney Olympics at the time,
올림픽이 있던 때였습니다.
to the end of the world,
호주 말고 다른데는 없었으니까요.
to go after Australia.
and then Singapore.
다시 싱가포르를 거쳤습니다.
opening the tap like this.
15분이 걸렸습니다.
물이 나오는 겁니다.
정말로요. (웃음)
아델라이드에 갔는데
in Adelaide, that's what I would say.
떨구어 졌습니다.
저희는 감사했습니다.
"집에 왔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작은 마을이죠. (웃음)
어머니가 놀라서는 말하기를,
You must take us back to Australia."
호주로 다시 데려다 주세요."
there were a lot of Asians in Australia
설명드려야 했죠.
모든게 좋았어요.
because they were less racist.
제가 여학교에 가야한다고요.
that publication. (Laughter)
들으셨는지 모르겠어요. (웃음)
and I was the only black child there.
저만 흑인이었습니다.
with a bit of a color on me.
여자아이들은 있었습니다.
to be under the sun.
though. Not the same.
전혀 다르죠. (웃음)
volunteering for an organization
더 힘들어졌습니다.
female genital mutilation program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this program was actually about,
저와 관련된 건지도 몰랐습니다.
nurses and doctors
의사들에게 교육했습니다.
어디에서 행해지고 있는지를요.
and now, Australia and London and America,
지금은 호주, 런던, 미국입니다.
we live in a multicultural society,
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come with their culture,
that we may not agree with,
문화적 관습을 가지고 있는데
여성 성기 절단을 보고 있었습니다.
of female genital mutilation,
they cut off the whole clitoris
대음순 일부를 절단하는 겁니다.
or your outer lips,
cut off the whole clitoris
완전히 봉합해서
to pee and have your period.
작은 구멍만 남게 되는 겁니다.
I pretty much had amnesia.
못하고 있었습니다.
and traumatized by what had happened,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못했었습니다.
happened to me,
알고 있었지만
of what had happened.
다들 그런 줄 알았습니다.
had a scar down there.
it all came back to me.
기억이 났습니다.
저를 잡고 있던 게 기억났습니다.
holding me down.
말로 표현이 안됩니다.
what was done to me was a terrible thing
저는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절단'하는 것이었죠.
it was called circumcision,
여기서는 '절단'이라고 했습니다.
I'm a mutilated person.
전 절단된 사람인겁니다. 이럴 수가.
저는 분노한 흑인여자였어요.
(Laughter)
어렸지만 분노했습니다.
아프리카식이 아닙니다.
pointing at your mother,
"엄마가 제게 무슨 짓을 한거에요."
talking about, Khadija?"
늘 큰소리 치셨습니다.
You circumcised me.
저한테 있던 걸 잘라 버렸잖아요."
that belonged to me."
나에게 그랬고, 나도 너에게 그런거야.
and I did it to you.
되는 거야. 아래쪽이 간지럽니?"
get itchy down there?"
거기가 간지럽겠어요?"
if you were not circumcised,
거기가 간지럽게 되는 거야."
get itchy all the time.
늘 갈망하게 돼."
너는 그렇게 되지 않는거지."
to sleep around with anybody."
was very strange. (Laughter)
어머니의 정의는 이상했습니다.(웃음)
of our first conversation.
저는 다시 학교를 갔습니다.
Dolly and Girlfriend magazines.
잡지가 있을 때였어요.
Anybody remember those sealed sections?
그거 기억나시는 분 있으세요?
(Laughter)
(웃음)
an article about pleasure
쾌락, 관계, 성이요.
that you had a clitoris, though,
있다고 가정합니다.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게 없거든요.
would moan like, "Oh! Oh!"
"오,오" 이런단 말입니다.
and their damned clitoris.
supposed to do with her life?
어떻게 되는 것이죠?
저도 느끼고 싶습니다.
"Oh! Oh!" and all of that.
and said to my mom,
어머니께 말했습니다.
I deserve pleasure,
저는 즐길 권리가 있대요.
how to find the clitoris."
찾을 줄 알아야 한대요."
have a problem finding the clitoris.
잘 못찾는데요.
It was Dolly that said that.
돌리 잡지에서 그랬어요.
I had an inner joke in my head
이런 농담을 했습니다.
그런 문제가 없을테니까." (웃음)
(Laughter)
I deserve pleasure, and do you know
저는 즐길 권리가 있대요.
뺏어 갔는지 알아요?
what you have denied me?
in the most sacred way.
저를 침탈했어요.
싶다고요, 젠장."
"Who is Dolly and Girlfriend?
"돌리와 친구가 누구니?
That's a magazine, mom, a magazine."
엄마, 그건 잡지에요."
두 세계에서 왔습니다.
not having a clitoris was the norm.
클리토리스가 없는 게 당연했고
호주아이입니다.
that was very clitoris-centric.
사회에서 살았어요.
매우 화가 납니다.
this strange phase of anger
혼란의 단계를 거쳤습니다.
an appointment with my therapist.
예약을 잡았습니다.
who has a therapist. There you go.
아프리카인이에요.
새로운 나라에 정착했고,"
and discrimination,
영어는 제3언어였고요."
and then there it was."
아닌 것 처럼 느껴져요."
I'm not a woman
불완전한 존재라고 느껴져요."
왜냐하면, 제가 알게 된 FGM은,"
목적이었으니까요."
the sexuality of women.
any sexual desire.
갖지 않는 겁니다."
"저는 이제 무성인거에요?
not feeling like having sex,
평생을 사는 거에요?
그래서 아직 미해결 중입니다.
around the age of 14,
normal periods because of FGM.
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and they were very painful.
고통스러웠습니다.
작은 공처럼 생겼습니다.
sitting there.
have children, Khadija."
못할 것 같아요."
an angry black woman.
흑인 여성이 되었죠.
no matter what your may defense may be" --
엄마가 저지른 일이",
생각하셨거든요,
is harming me, and it's hurting me.
저를 상처주고 해롭게 하고 있어요."
as a mother."
하고 말했습니다.
for an apology, by the way.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이 생깁니다.
늘 아픕니다.
"You can't have kids."
알고 있습니다.
Is this what life is all about?"
이게 삶이라는 거야?"하고 생각했죠.
who have gone through FGM
불임이 됩니다.
incontinence, constant infections, pain.
감염과 고통에 계속 시달립니다.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줍니다.
because I was born a girl
벌어진 일입니다.
all that pain, into advocacy
인권운동으로 바꾸었습니다.
to be worth something.
했기 때문입니다.
called No FGM Australia.
단체의 관리자가 됐습니다.
어째서 No FGM 호주냐구요?
Child Protective Services,
전화해야 했는데
is planning on performing FGM on her.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I'll let that sink in: four years old.
더는 얘기 안하겠습니다, 4살이에요.
who is married to a Malaysian man.
결혼한 여성을 만났습니다.
he was going to take their daughters
딸을 데리고
시키겠다고 말했답니다.
to cut off their clitoris.
He said they were dirty.
불결하기 때문이라고 했답니다.
나와 결혼했잖아요."
문화적 신념이에요."
where she said to him,
그녀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딸들에게 그렇게 못해요."
will you do that to my daughters."
wasn't aware of what FGM was,
알지 못했다면
flown over to Malaysia
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땐
changed for the rest of their lives.
수 백만 달러가 드는 걸 아십니까?
with an issue like that?
FGM을 겪을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performed on them.
아프리카만의, 중동만의 문제가 아닌,
It's not a Middle Eastern problem.
it has no color, it's everybody's problem.
모두의 문제입니다.
a right to sexual pleasure.
우리 신체에 대한 권리가 없다 합니다.
a right to our bodies.
and you know what? Bullshit.
아십니까? 그건 헛소리입니다.
역할을 할 수 있어 자랑스럽습니다.
I'm doing my part in ending FGM.
who is at risk of FGM.
처한 아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who comes to your hospital
FGM 위험군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호주에서도
because of a culture.
학대받고 있습니다.
a defense for child abuse.
아동학대를 해선 안됩니다.
to see FGM as an issue for you.
본인의 문제로 보셨으면 합니다.
여러분 딸, 자매, 사촌일 수 있어요.
your sister, your cousin.
노력하겠지만, 할 수 없습니다.
주시길 호소합니다.
서명해 주세요.
and it'll come up, and sign it.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for FGM victims in Australia
여기서 자라는 소녀들이
growing up here
당하지 않게 하는 겁니다.
has a right to pleasure.
즐길 권리가 있으니까요.
to their bodies being left intact,
보존할 권리가 있습니다.
has a right to a clitoris.
권리도 있습니다
동참해 주십시오.
"악이 판치기 위해서는,
and women to do nothing."
아무 일도 안하면 된다."
of female genital mutilation
절단이라는 악행이
그냥 두시겠습니까?
that it ends in my generation.
동참해 주십시요.
ABOUT THE SPEAKER
Khadija Gbla - Cross-cultural consultantKhadija Gbla was born in Sierra Leone, spent her youth in Gambia, and as a teenager put down roots in Australia. She uses her cross-cultural heritage to promote understanding in both directions.
Why you should listen
Khadija Gbla was just 3-years-old when the war broke out in her country, Sierra Leone. While her family initially escaped to Gambia, 10 years later they attained refugee status and resettled in Adelaide, Australia. The transition was complex—Khadija experienced racism, illness and depression—but threw herself into her education. She discovered that she had a unique talent: the ability to translate across two very different cultures.
Khadija first used this talent as a peer educator for South Australia’s Women’s Heath Statewide program, where she talked to health professionals about female genital mutilation — helping them understand what it is, where it happens, and the cultural beliefs that surround it. She’s since used her multicultural voice to offer advice on policy through South Australian Government Minister’s Youth Council, to organize camps and activities for newly-arrived refugees and to raise awareness about both sexual and mental health issues among her peers. She has represented Australia in the international arena at the Harvard National Model United Nations, Commonwealth Youth Forum and Australian and Africa Dialogue, and speaks regularly at a wide variety of events to make sure that her perspective is heard.
Khadija Gbla | Speaker | TED.com